소실된 마당의 재림 - 자이매거진 | BEYOND A.
2029
INSIGHT | EDITION

소실된 마당의 재림

테라스 1

느지막한 주말 오전, 야트막한 문지방 하나를 넘자 눈앞에 ‘비밀의 화원’이 펼쳐진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이곳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일상의 고민과 번잡함을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든다. 오후가 되면서 이 근사한 은신처는 이내 얼굴을 바꾼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붉은 노을 아래서 소소한 파티가 열린다. 완벽한 주말을 선사한 이 멋진 공간을 우리는 ‘테라스’라고 부른다.

테라스 1

집 본연의 기능에 주목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세르게이 마크노Sergey Makhno는 지난 3월 <디진Dezeen>에 팬데믹이 우리의 주거 공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칼럼을 기고했다. 여기서 그는 “시대를 걸쳐 집의 1차적 기능은 안전”이었다며 “이제 사람들은 효과적인 사회적 격리가 가능한 집이 필요하게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과거 혹독한 기후와 맹수의 습격, 적의 침입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지었던 것처럼 이제 바이러스로부터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집이 각광받게 되리라는 것. ‘흩어져야 사는’ 이 미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집을 선호하게 됐다.

“이제 사람들은 효과적인 사회적 격리가 가능한 집이 필요해졌다.”

근래 들어 단독주택이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부동산 중개 플랫폼 레드핀의 발표에 따르면 구매자의 약 89%가 출퇴근 시간이 짧고 백야드가 있는 단독주택을 선호한다. 미국의 부동산 컨설팅업체 오토밸류에이션 그룹 역시 비슷한 조사 결과를 내놨다. 지난 5월 뉴저지 인근의 단독주택 계약 건수가 지난해 동기 대비 69% 급증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격동기를 거치며 왜 집에 ‘숨 쉴 틈’이 필요한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테라스나 발코니가 새롭게 조명받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테라스에 주목해야 하는 진짜 이유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테라스’의 어원은 라틴어 ‘테라terra’, 즉 땅을 뜻한다. 독일어 어원 사전에서는 이를 ‘단이 진 경사지와 단이 진 형태로 축조된 대지’로 설명하고 있다. 또 건축용어집은 ‘실내 바닥과 지면과의 높이를 조절하고 정원에 접해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건축의 지대(地帶) 면처럼 근대건축에서 넓게 꾸민 지대·기단(基壇)’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테라스란 자연적인 지면을 깎은 단뿐만 아니라 인공적으로 축조한 단도 포함된다. 정의야 어찌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이 우리의 주거 공간 중 가장 땅을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선구적인 건축가와 건설사들은 일찍이 땅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이해하고 테라스와 주거 공간을 융합시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일례로 덴마크의 젊은 건축 거장 비야르케 잉엘스Bjarke Ingels가 2007년 설계한 마운틴을 들 수 있는데 총 80세대로 이루어진 이 주거 공간은 잉엘스 스스로 ‘실용적인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을 만큼 효율적이며 이상적이다.

“이 건축 계획의 골자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아파트 건물을 짓고 그 뒤에 대형 주차 건물을 세우는 거였지만 우리는 부지 전체를 주차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수직형 아파트 건물 대신 전 세대에 정원이 있는 층계형 아파트로 주차장을 덮어 산처럼 만들자고 제안했다.” – 비야르케 잉엘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앱스트랙트> 중 –

잉엘스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아파트는 과감하고 실험적인 구성만큼이나 테라스로 눈길을 끌었다. 잉엘스는 전 세대에 전용면적에 준하는 루프톱 가든을 설계했는데 이로써 입주민들에게 근사한 자연을 선사하는 동시에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를 완성했다. 주거 공간과 테라스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영국의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 피터 바버 아키텍츠Peter Barber Architects가 올해 런던 페컴Peckham 지역에 새롭게 선보인 아파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복원된 마당의 기억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1990년대 압구정과 청담동 등 강남 일대 상공간을 통해 처음 소개한 테라스 문화는 최근 ‘킨포크’, ‘휘게’, ‘라곰’ 같은 키워드와 맞물리며 급부상했다. 국내에서도 일부 건축가들과 건설사들의 주도로 테라스를 주거공간에 접목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져왔다. GS건설은 2014년부터 저층세대 및 최상층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테라스를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목동파크자이, 경희궁자이의 로프트테라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16년 이후 테라스를 더 적극적으로 도입한 테라스 단지인 자이더테라스부터 청라파크자이더테라스(2016), 광교파크자이더테라스(2017), 동탄레이크자이더테라스(2018)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자이의 테라스는 블록형 단독주택인 자이더빌리지를 통해 한국 주거 공간의 마당 개념인 개별 정원을 도입하게 된다. 이후 기준층 테라스인 ‘로지아Loggia’로 이어지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열린 외부 공간은 단순히 면적만으로는 값을 매기기 어려운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혹자는 ‘공간은 면적보다 체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테라스야말로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공간인 것이다.

테라스는 우리에게 소실되었던 마당의 재림에 가깝다.

특히 한국의 주거 공간에서 테라스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소실되었던 마당의 재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유기적으로 잇는 플랫폼이자 내·외부의 중간자이며 생활의 터전이었던 마당이 21세기 들어 테라스라는 이름으로 귀환한 것이다.

테라스는 그저 비워진 공간이 아니다. 자연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접점이자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안식처이며, 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바로 테라스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주거 공간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이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 덕분에 테라스는 오늘날 현대 주거의 새로운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Editor | MH Choi
Photography | Morley von Sternberg
Illust | HK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