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no Yurika
인터넷에 ‘구축 아파트 리모델링’ 혹은 ‘구축 아파트 인테리어’를 검색해 본 적 있다면, 상단 게시물을 몇 개만 살펴봐도 어떤 정형화된 공식을 쉽게 알아챌 것이다. 중문을 설치하거나 교체하고, 도배를 다시 하고, 몰딩을 없애는 과정들을 거쳐 뽀얀 집으로 거듭난다. 완성한 이후로는 세월의 흔적이 놀라울 정도로 말끔하게 지워져 있다.
벤치의 등받이를 화분으로 만든 인테리어 ©Tatsuya Tabii
이러한 천편일률인 결과물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주목해도 좋다. 여기서 소개하는 해외 아파트 세 곳은, 거주자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기능 등을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리모델링 사례다. 그들의 방법을 국내 아파트 구조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일 수 있으나,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핵심 아이디어에 주목해 인사이트를 발견해 보길 권한다.
인테리어 포인트가 된 철제 선반 ©Fran Parente
가족의 성장에 따라 분화되거나 합쳐지는 방
핵가족의 생애를 느슨하게 그려본다. 자녀가 어릴 땐 부모와 한방에서 지내다, 무럭무럭 자라 자신만의 방을 필요로 하게 되고, 성인이 된 언젠가 독립하면 부모만이 남는, 이 일련의 궤적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일본 건축가 마사키 이와모토는 가족의 성장에 따라 방이 분화되거나 합쳐지는 집을 설계하기로 했다. 무려 30년 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사진의 맨 왼쪽은 개인 공간, 가운데는 거실과 부엌과 같은 공용공간, 오른쪽은 수납공간(붙박이장)으로 나뉜다. ©Kono Yurika
한국으로 치면 24평 정도 되는 이곳은 거실, 부엌, 화장실 하나, 침실 둘, 다다미방 하나로 구성됐다. 건축가는 이곳을 자신과 아내 그리고 두 자녀가 지낼 보금자리로 바꾸며 나란히 있던 두 침실을 터버렸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자고도 남을 크기의 큰 방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 방 하나는 필요에 따라 두 개 혹은 세 개, 최대 네 개로 다시 나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침실과 붙박이장 모두 미닫이문을 사용했다. 미닫이문은 좁은 공간에서 문을 여닫기 위한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울 때 좋은 대안이 되며, 공간을 합치거나 나눌 때 편리하다. ©Kono Yurika
변경 전/후 도면. 나란히 있던 두 침실을 가변형 침실로 바꾸고, 거실 한쪽에 있던 다다미방을 철거하는 대신 그 자리에 조그마한 서재(작업실)를 마련했다. ©ICADA + Masaaki Iwamoto Laboratory
그 가변성의 열쇠가 된 것은 책장. 이 집은 벽이 아니라 책장이 방을 구획한다. 세 개의 책장은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책장을 한 곳으로 몰면 하나의 큰 방이 되고, 책장을 띄엄띄엄 배치하면 최대 네 개의 방이 생기는 식이다. 그 덕에 가족 구성원이 각자 독립된 방을 쓸 수도 있고, 미래에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의 취미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책장 배치에 따라 방이 분화되거나 합쳐진다. 책장은 새로 제작하기보다 기존 가구를 활용했다.
©Yashiro Photo Office
가족의 성장에 따라 가변적으로 활용되는 공간을 상상한 그림 ©ICADA + Masaaki Iwamoto Laboratory
공간의 변화에 따른 단열을 체크하고, 어떤 변화에도 단열이 잘 되도록 구상한 건축가. 집 전체에, 심지어 천장까지 알루미늄 포일이라는 단열재를 한 번 더 둘렀다. ©ICADA + Masaaki Iwamoto Laboratory
플랜테리어에 기능까지 부여한 집
플랜테리어는 식물(plant)과 인테리어(interior)의 합성어로, 식물로 실내를 꾸미는 것을 뜻한다. 시각적인 즐거움과 정서적 안정 같은 효과를 주는 플랜테리어가 꾸밈을 넘어, 인테리어적인 기능까지 갖추는 경우는 드문데 ‘T 하우스’는 플랜테리어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집이다.
T 하우스의 플랜테리어 ©Tatsuya Tabii
건축사무소 FATHOM이 재단장하기 전, 이 집은 대량 생산된 가구들로만 꾸려진 상태였다. 클라이언트는 이러한 취향과 거리가 멀었고 건축가는 그를 위해 기성품으로는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인테리어를 하고자 했다.
집에 들어서면 곧바로 눈길을 끄는 가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바닥과 똑같은 재료로 일체화돼서 일견 가구보다는 건축의 일부처럼 보이는 이것은, 화분이자 벤치이다. 벤치의 등받이 부분에 식물을 심을 수 있도록 디자인해 제작됐다.
벤치와 통일감을 주는 흰색 벽은 굴 껍데기를 재활용한 페인트로 새로 도장했다. ©Tatsuya Tabii
변경 후 평면도. 벤치 겸 화분이 서재와 부엌 사이에 자리하며 두 공간을 유기적으로 구분해준다. ©FATHOM
오직 이곳만을 위해 만든 벤치 겸 화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가구는 기성 제품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맞춤 제작 가구가 집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이곳의 인테리어는 특별해질 수 있었다.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 식물이 천장에도 반사될 수 있게 했다. ©Tatsuya Tabii
오래된 집의 포인트가 되는 수납공간
정리 정돈은 늘 골칫거리 중 하나로 꼽힌다. 날마다 하나씩 버리는 2010년대에 부상한 미니멀 라이프에 이어, 이제는 정리수납 전문가와 이를 위한 자격증까지 생겼을 정도다. 심지어 구축 아파트는 붙박이장 같은 수납공간이 부족해 더더욱 정리 정돈에 애먹기가 쉬운 상황이다.
수납공간이 부족한 구축 아파트를 위해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Fran Parente
브라질의 건축설계사무소 FGMF가 리모델링한 ‘아부드 아파트먼트’는 선반을 인테리어 포인트로 적용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방들이 긴 거실을 따라 배치된 형태였다. FGMF는 거실과 방 사이의 벽 중 철거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없애 개방감을 우선 확보하고, 철거 자리에 철제 선반을 설치했다. 선반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지만 얇은 부재 덕에 개방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왼쪽) 변경 전 © FGMF, (오른쪽) 변경 후 ©Fran Parente
긴 거실을 따라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평면 구조. 거실과 방 사이에 철제 선반을 설치했다. © FGMF
선반에는 인테리어를 더욱 돋보이게 할 오브제나 책, 식물을 올려두었다. 대신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곳은 문을 달아 가렸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과 서재 등에도 같은 방식으로 철제 선반을 사용해서 인테리어의 통일성을 높였다. 이렇게 집 한쪽 벽면을 채운 선반은, 집의 인상을 좌우하며 거주자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낸다.
©Fran Parente
철거하지 못한 벽은 목재 마감으로 바꾸고 그 앞에 선반을 두었다. 필요한 곳에는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Fran Parente
가족의 성장에 따라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 엇비슷한 가구에서 탈피하려 새로 고안한 플랜테리어 가구, 생활의 골칫거리를 집의 주요 장식으로 바꿔버린 선반. 남다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 세 사례 뒤에는 살고 싶은 집 혹은 꿈꾸는 삶에 대한 분명함이 자리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래된 집을 특별하게 고쳐보고 싶다면, 꿈꾸는 라이프스타일을 먼저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WRITER | GR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