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오는 일은 많지만,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들은 답답한 일상에 지친 도시인으로 하여금 시골 생활을 꿈꾸게 했다. ‘촌’스러워 오히려 ‘힙’한 트렌드, ‘러스틱 라이프’를 알아보자.
개설 1년 반 만에 32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모은 ‘오느른(onulun)’은 전북 김제에 시골집을 마련한 방송 PD의 일상을 담는 유튜브 채널이다. 4,500만 원에 구입한 폐가를 고치는 과정을 공유하며 시작해,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 매주 금요일 업로드하는 시골 살이에 사람들은 공감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해당 마을을 방문했다는 ‘인증’을 올리거나, 시골 살이를 결심했다는 댓글도 보인다. 서울 역세권의 전셋집 대신 초록빛 물결치는 논밭 풍경으로 가득한 ‘벼세권’에 터전을 마련한 MZ세대 직장인의 생활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또는 따라 하고 싶은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러스틱(rustic)’이란 ‘시골풍의’ ‘소박한’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인테리어 디자인에서는 깔끔하지만 인간미가 부족한 미니멀 디자인과 반대되는, 자연스럽고 정돈되지 않은 스타일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리포트 2022>를 통해 자연과 시골 고유의 매력을 즐기며 도시 생활에 여유와 편안함을 더하는 생활 방식을 ‘러스틱 라이프’라고 명명하고 2022년 주요 트렌드로 선정했다. 러스틱 라이프는 ‘오느른’ 채널의 운영자처럼, 일상에 지친 도시인이 건강과 휴식을 위해 도시와 시골을 오가거나,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기는 새로운 트렌드다.
오도이촌
도시에서 귀촌하거나 귀향하는 현상을 ‘이도향촌(離都向村)’이라고 한다. 도시와 시골 생활을 병행하며 일과 휴식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러스틱 라이프는 그보다는 ‘오도이촌(五都二村)’에 더 가깝다. 주중 5일은 도시에서, 주말 이틀은 시골에서 생활한다는 의미. 이런 생활을 통해 소박하고 촌스러운, 보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더하고, 도시와 시골의 생활을 조화시키는 건강한 ‘이중생활’을 시작하는 것. 주말마다 자연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넘어 시골에 레저용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하는 것도 새로운 주거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
귀농, 귀촌 희망 41.4%
202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실시한 국민 의식 조사에 따르면 도시민의 41.4%가 앞으로 귀농 또는 귀촌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전년 대비 6.8% 증가한 수치. 하지만 경제적 기반과 가족이 도시에 있는 상황에서 귀농과 귀촌을 위해 선뜻 도시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한 번에 삶의 터전을 옮기기보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시골에 거점을 마련하고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러스틱 라이프를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활 공간을 옮기지 않고 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러스틱 라이프를 실천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 따르면 2010년 104ha 정도였던 우리나라 도시 텃밭의 면적은 2018년 1,300ha로 8년 사이 13배 가까이 넓어졌고, 도시 농부의 수도 15만 3,000명에서 212만 1,000명으로 14배가량 증가했다.
홈파밍
코로나 사태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화초를 키우는 홈가드닝을 넘어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곡물 등을 키우는 ‘홈파밍(Home Farming)’ 역시 러스틱 라이프 트렌드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식물을 돌보고 마침내 수확의 결실을 거둬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홈파밍은 팬데믹 이후 건강을 중요시하는 채식 트렌드와도 결을 함께 한다. 이와 함께 간편하게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홈파밍 기기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LG전자의 ‘틔운’, 엔씽의 ‘엔씽 프레임’ 등 식물 생장에 좋은 조명, 친환경 토양, 영양제 등을 모두 담은 실내용 스마트팜 제품은 손쉽게 다양한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게 하고, 인테리어 효과도 더한다.
불멍·풀멍·물멍
러스틱 라이프의 유행은 여행 트렌드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러스틱 라이프를 추구하는 이들은 수려한 경관이나 이름난 문화재보다는 자기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시골집이나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한적함과 편안함을 만끽하는 ‘촌캉스(시골 + 바캉스)’와 ‘옥캉스(한옥 + 바캉스)’ 등도 러스틱 라이프의 유행에 힘입은 트렌드. 이와 더불어 유행어가 된 불멍과 풀멍, 물멍은 타오르는 모닥불이나 넓게 펼쳐진 바다나 논밭 등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멍 때리는’ 걸 의미하는 신조어다.
시골로 떠나거나 캠핑을 하지 않고 간편하게 불멍, 풀멍, 물멍을 즐길 수 있는 방법도 등장하고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통해 모닥불, 산과 들, 바다 등을 촬영한 영상을 틀어 놓는 것. EBS TV는 월~목요일 밤 11시 35분 <가만히 10분, 멍TV>를 통해 자연, 요리하는 모습, 일상 소음 등을 아무 설명 없이 가만히 보여준다. 불꽃을 감상할 수 있는 휴대용 에탄올 난로나 반려어, 수초를 기를 수 있는 수족관을 장만하고 이를 바라보며 ‘멍 때리는’ 사람도 많다. 전문가들은 이런 ‘멍 때리기’를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러스틱 라이프 4단계
<트렌드 리포트 2022>는 러스틱 라이프의 층위를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 단계는 ‘떠나기’.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찾아 잠시 떠나는 여행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머물기’. 여행하는 것보다 더 오래 머물며 일상을 경험하는 체류형 여행이다. 몇 년 전부터 제주도, 발리, 하와이 등 국내외 유명 휴양지에서 오래 머무르며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체류형 여행으로 각광받아온 ‘한 달 살기’의 대상지가 러스틱 라이프 트렌드의 함께 동해, 속초, 양양, 남해 등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결과 ‘호텔에삶’ ‘미스터맨션’ 등 장기 숙박 예약 플랫폼의 매출이 급증하고, 각 지자체에서도 액티비티와 경험, 감성을 강조하는 체류형 관광 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 번째는 ‘자리 잡기’다. ‘떠나기’와 ‘머물기’를 통해 시골 살이가 자신에게 맞는다고 판단한 이들이 시골에 집을 사거나 임대를 하면서 세컨드 하우스라는 주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마지막 단계는 ‘둥지 틀기’. 주거지는 물론 삶의 기반까지 시골로 옮겨 온전한 시골 살이를 실천하는 단계다.
조금 불편하고 촌스럽지만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러스틱 라이프 트렌드가 빠르게 확산된 것은 코로나 사태의 영향이 크다. 온라인과 모바일 환경의 발달로 재택 또는 원격 근무가 확산되며 업무와 수업, 쇼핑 등을 집에서 해결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도시를 벗어난 생활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 것. 한적한 시골은 상대적으로 코로나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서울부동산포럼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이진만 미국 드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시카고의 주거 현황을 전하며 “MZ세대가 집에 투자를 많이 하면서 값이 싼 집을 사서 리모델링하는 게 활성화됐다”라며 “집값이 싼 지역을 찾아 외곽으로 이동하고, 코로나로 소득이 준 임차인도 월세가 더 싼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웹 3.0과 메타버스가 본격화되면 이런 흐름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적 드문 시골에서도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건강한 이중생활인 러스틱 라이프로 ‘촌’스러운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힙’한 트렌드가 되었다.
WRITER | KY CHUNG
ILLUSTRATOR | MALLANGL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