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아파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고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변할까? 유럽의 현대건축이 스페인 독감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주거 양식도 달라질 전망이다. 불특정 다수와의 접촉을 줄이면서 자연을 집 가까이 둘 수 있는 정원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원 1
스페인 독감 시대의 옥상 정원, 코로나 시대의 아파트 정원
지난해 구글이 발표한 ‘공동체 이동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공원 방문은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된 시기에 평균치보다 약 51% 증가했다. 실내 공간이 위험한 탓에 개방된 공간으로 몰린 이유도 있겠고, 공원이 원래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사람들이 전보다 공원을 더 많이 찾는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다.
대규모 바이러스 유행은 인류의 생활양식을 조금씩, 확연히 바꿔왔다. 지난 역사만 살펴봐도 그렇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해 인구의 1/3이 죽었다. 노동력이 줄어드니 봉건제가 무너지고 상업적인 현금 기반의 경제 체제로 변화했다. 15세기 말에는 식민지로 삼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던 스페인 사람들이 천연두를 옮겼고 병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자 경작 지대가 원시림으로 복원됐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되던 다량의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화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상공업이 발전했고 물질의 풍요는 정신의 고양을 이끌어 유럽 각지에서 계몽사상이 움트는 토대가 이뤄졌다.
Photo by Jenna Beekhuis
인간의 생활 양식에 큰 영향을 주는 바이러스는 건축 양식에서도 예외는 없다. 그 예로 1918년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스페인 독감의 영향이 유럽의 현대건축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그 결과 당시 지은 집은 사람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그중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요소는 거리에 있던 정원을 가족만 이용할 수 있도록 집 안으로 들여 ‘중정’을 만든 것이다. 폐쇄적인 생활 속에서 자연을 곁에 두려는 의지는 코로나 시대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중정처럼 어느 정도 폐쇄적인 곳은 공동 주거 단지에 조성한 정원과 더 닮았다. 지금, 아파트 정원을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1918년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스페인 독감의 영향은
유럽의 현대건축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한국 아파트 정원의 역사
우리나라 아파트에는 언제부터 정원이 등장했을까? 1930년대 한국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진 충정 아파트는 일본에서 들여온 양식이었다. 그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대형 상가가 있는 거리에 인접하며 중앙에 정원이 있고 임대로만 점유할 수 있는 건물을 아파트로 분류했다. 우리나라 초대 아파트의 정원은 건물 내부 공간을 정원으로 꾸민 중정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파트 정원이 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후다. 당시 아파트 분양가가 자율화되면서 다양한 브랜드가 속속 생겨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아파트 안에 정원이 있다는 사실만 언급할 정도로 단순한 형태의 정원이었다면, 2000년대 초 아파트 정원에는 ‘생태’라는 개념이 도입됐다. 정원이란 사전적 정의로 자연 재료나 인공물을 이용해 꾸민 뜰이긴 하나, 그 자체로 건강한 하나의 숲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2009년부터 2014년 사이에 설계한 아파트 정원은 소규모의 고급스러운 정원을 표방했다. 거주하는 동 앞에 나서면 조경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의 정원 트렌드는 스페인 독감의 영향으로 생겨난 중정처럼 소규모의 프라이빗한 정원이다.
김포 자이더빌리지 정원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위한 정원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면서 달라진 환경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하는 것은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해외 여행은 거의 불가능하고 국내 여행 또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지 못 하다. 한 글로벌 여행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의 여행객들은 좀 더 단순한 행복을 찾아 여행하려는 욕구가 높아졌다고 한다. 등산, 상쾌한 공기. 자연, 휴식 등이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 것이다. 여러 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연에 대한 순수한 갈증이 더 높아지고 있는 것. 이런 지점에서 아파트 정원은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돼줄 것이다.
DMC에코자이 정원
자이의 정원, 엘리시안 가든은 룸 가든이라는 동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마치 제주의 곶자왈에 있는 것처럼 원시림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정원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세밀한 기획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 풍경을 고려하여 초목을 선정하고, 상징수인 팽나무가 새로운 환경에서 무성해질 수 있도록 제주의 이끼, 돌 등 암석원을 배식했다. 또 팽나무의 수관 끝과 끝이 맞닿아 하나의 울창한 캐노피가 만들어지도록 수형과 방향을 고려하여 심는 등 생태 리듬을 조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엘리시안 가든은 룸 가든이라는 동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여행을 가지 않고도 마치 제주의 곶자왈에 있는 것처럼
내 집 앞에서 원시림을 체험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 중이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사자 수를 뛰어넘었다고 밝혔다. 우리가 사는 집, 동네의 모양은 팬데믹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할 것이다. 외출하기 어려워진 상황으로 인해 주거 공간에 자연을 들이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더 안전하게 사람들과 만나고 바이러스로 지친 심신에 평안을 주는 정원은 미래 주거 환경의 주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ditor | KK Baek
Photography | GSENC
Illust | HK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