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뇌는 마음에 드는 향기를 맡았을 때, 그 기억을 더욱 강력하게 간직한다. 오감 중에서도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에 직접적으로 작용해 우리의 정서를 강렬하게 자극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고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가 이에 대한 좋은 예시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으며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주인공은 홍차와 마들렌의 향기에 빠져드는 순간, 어떤 쾌감이 마음에서 솟아났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특정한 향기와 함께 각인된 기억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과거 그 향기를 맡았던 당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감각과 경험, 성장하는 향기 산업
미국의 한 후각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대략 1만 개 정도의 냄새를 구별해 인식하고, 인상을 강하게 남긴 냄새의 경우 맡은 지 1년이 지난 후에도 65%의 사람들이 이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반면 시각 이미지의 경우 50%만 기억이 되살아나며 기억의 한계는 3개월 정도라고 한다.
후각이 남기는 기억이 시각보다 강렬하고 더 오래 남는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기업들은 ‘향기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향기 마케팅은 고객들에게 브랜드의 특성에 맞는 향기를 통해 브랜드와 관련된 공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재방문율을 높이는 마케팅 기법을 말한다.
하나금융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향기 시장 분석 보고서>는 2020년 2조 2,600억 원 규모이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 항료 시장 규모가 2028년에는 3조 6,2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향기는 향수와 화장품 산업에서 식음료, 의료,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산업으로 그 영역을 키우고 있다.
브랜드에 향을 입히다
다양한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향기로운’ 공간 경험을 선사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며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브랜드가 자사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향을 개발하고, 매장에 해당 향을 분사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향기로 전달하고 있다.
향기 마케팅으로 잘 알려진 코스메틱 브랜드 러시는 매장은 물론, 매장 근처 30m 거리에서도 특유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진하고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긴다. 이 시그니처 향은 러시의 베스트셀러인 입욕제 향을 베이스로 제작됐다. 던킨도너츠는 사람들이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특유의 고소한 향기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향기 라디오’ 마케팅을 선보였다. 시내버스 등에서 던킨도너츠의 라디오 광고가 나올 때 그곳에 설치된 디퓨저에서 커피 향기를 분사시킨 것. 이 캠페인이 진행된 동안 매장 방문객이 16% 늘었고 커피 판매는 29% 증가했으며, 해당 광고는 칸 국제광고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시그니처 향을 통해 브랜드를 알리고, 가치를 높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교보문고는 시그니처 향인 ‘더 센트 오브 페이지(The Scent of Page)’를 개발했다. 이 은은한 피톤치드 향은 서점 방문 고객에게 울창한 숲을 거니는 느낌을 주고자 개발되었다. 향기 마케팅 전문 기업 센트온이 개발한 ‘포레스트 오브 산청 향’은 한국의 국제공항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향이다. 경남 산청 지방의 적송 향과 사향, 난초 향 등을 조합한 향기로 여행객과 공항 직원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시트러스와 베르가모트, 유자, 스파이시한 클로브 등의 향을 배합한 ‘플리트비체’라는 시그니처 향을 만들어 매년 우수 고객에게 이 향이 담긴 제품을 제공한다. 고급화 전략의 일환인 것. 호텔의 경우 객실과 로비에 뿌리는 시그니처 향을 고객에게 판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워커힐 호텔은 자연의 향을 고스란히 담은 ‘워커힐 시그니처 디퓨저’를 출시해 고객이 호텔에서 경험할 법한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여운을 제품화 했다.
천연 향료로 만드는 니치 향수의 인기는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바라는 젊은 세대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나만을 위한 향기, 니치 향수부터 제작 공방까지
전문가들은 향기 산업의 빠른 성장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실내 체류 시간이 급증하면서 향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한 덕분인 것으로 본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실제로 2021년 미국의 방향제 매출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해 10%, 향초 매출은 30% 증가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위한 편안하면서도 특색 있는 차별화 요소로 ‘향기’를 선택한 것. 자연스럽게 개인화된 향에 대한 수요 역시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디퓨저나 향초 등 실내 방향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면 대면 활동이 늘어난 최근엔 소수의 프리미엄 향수를 뜻하는 ‘니치(Niche) 향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천연 향료와 고급 원료로 제작되고, 체취와 어우러져 독특한 향기를 내는 니치 향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서 인기 높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니치 향수 브랜드의 경우, 신제품을 착향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다.
20만~40만 원대에 이르는 니치 향수의 가격이 부담스럽거나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만의 향을 만들고 체험할 수 있는 향수 공방과 원데이 클래스도 늘어나고 있다. 레트르 성수, 르미에르 연남 등 트렌드에 민감한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주로 위치하는 향수 공방에서 실시하는 향수 제작 클래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향과 향수의 종류를 결정하면, 담당 조향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만을 위한 향수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향기를 통한 나만의 공간 경험을 바라는 소비자가 늘면서 방향제 등의 매출도 함께 성장했다.
향기에 기술을 더하다, 센테크의 등장
‘센테크(Scent-tech)’는 향기(Scent)와 디지털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현재 센테크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역은 ‘디지털 조향’ 분야다. AI 및 디지털 후각 기술을 활용해 원하는 향기를 저렴한 가격에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국내 스타트업 딥센트가 대표적인데, 이 회사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원격으로 향의 비중과 농도를 조절해 원하는 향기를 만들 수 있는 스마트 디퓨저를 개발했다.그 다음으로 주목받는 영역은 사물인터넷과 AI를 통해 공간에 향기를 분사하고 악취를 제거하는 디지털 향기 제어 분야다. AI 모델을 통해 냄새를 분류하고, 불쾌한 냄새를 없애는 중화제를 자동 조합해 공간의 악취를 제거해주는 앱을 개발한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무디파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출처 | 인할리오 홈페이지
필요에 따라 향를 고를 수 있는 차량용 지능형 향기 디퓨저.
마지막은 디지털 센트 케어(Scent-care). 즉, 향기를 통한 헬스 케어 분야다.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앱센트 메디컬’은 향기를 활용해 수면 장애 치료를 돕는 디지털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수면 중에도 새로운 냄새를 맡으면 코로 숨쉬려 한다는 특성을 살려 수면 무호흡증을 완화시키는 방식이다. 미국의 스타트업 ‘인할리오’의 차량용 지능형 향기 디퓨저에는 악취 제거 기능은 물론 공기 중 세균 제거, 기분 개선, 멀미 완화 등을 위한 카트리지가 들어 있어 필요에 따라 향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전자 코(E-nose)’ 기술을 활용한 인공 후각 센서가 환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속의 휘발성 물질을 분석해 암을 진단하는 등 향기와 관련된 디지털 센트 케어의 영역은 계속 확장될 전망이다.
향기는 차별화된 경험과 개인화된 제품에 열광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그 다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만의 것을 추구한다. 향기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나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고 기억과 감정을 간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또한 사람들은 여유를 갖고 소득이 높아질수록 향기에서 치유를 받고, 특별한 향기를 찾게 되기에 향기 산업의 전망은 무척 밝아 보인다.
WRITER | KY 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