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한다. 온라인을 통해 많은 물건을 만나는 요즘,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들은 역설적으로 오프라인 공간이 지닌 힘에 주목하고 있다. 공간은 고객과 상품이 가장 먼저 만나는 접점일 뿐 아니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매체이자 홍보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면서 플래그십 스토어와 팝업 스토어, 브랜드 전시 등 오감을 통해 브랜드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들이 곳곳에 문을 열고 있다. 성공적인 공간 마케팅의 최근 사례들을 통해, 브랜드가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공간에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브랜드의 정체성 표현
우리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결핍을 채우기보다 취향을 만족시키고 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해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가치를 담은 브랜드가 만든 제품을 원한다는 의미다. 브랜드들은 자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플래그십 스토어와 팝업 스토어, 아티스트와의 협업 전시 등을 통해 접점을 만들고 있다.
젠틀몬스터 하우스 도산
폐점한 목욕탕 건물로 ‘공존’을 표현한 북촌 스토어, 동화적인 스토리를 담은 홍대 스토어, 각국의 민간신앙에서 영감받은 요괴가 가득한 광저우 스토어 등 독특한 공간을 통해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전해온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2021년 2월 문을 연 ‘젠틀몬스터 하우스 도산’은 젠틀몬스터와 스킨케어 브랜드 탬버린즈,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의 세계관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고객들은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자리한 각 브랜드의 독특한 정체성을 느끼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젠틀몬스터의 선글라스로 가득한 3층에선 높이 2미터에 달하는 거대 6족 보행 로봇 ‘프로브’가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브랜드의 성격을 존재 그 자체로 드러낸다.
작년 10월 문을 연 철제 가구 브랜드 레어로우의 플래그십 스토어 ‘레어로우 하우스’는 성수동의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다. 레어로우는 이 공간에 자사의 가구를 배치하고 판매하는 수준을 벗어나, 레어로우와 결이 비슷한 다른 브랜드의 가구, 소품 등을 함께 배치했다. 제품 판매보다는 레어로우가 추구하는 ‘날 것’이라는 가치를 경험하는 공간을 의도한 것이다. 지난 3월부터는 2층 쇼룸을 뮤지션 선우정아와 함께 ‘더 필요한 게 없는 세계’라는 콘셉트로 그의 작업 공간 겸 생활 공간으로 꾸몄다. 누군가 실제로 일하고, 생활하는 것 같은 생동감 가득한 공간. 레어로우는 3~4개월마다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해 쇼룸을 꾸밀 계획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쿨한’ 자동차 브랜드는 자동차를 만들지 않는다. 자동차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피치스는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부터 휠과 시트, 대배기량 엔진의 굉음에 어울리는 음악,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패션까지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을 스타일링한다. 그런 피치스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피치스가 뭐하는 브랜드인데?” 피치스 여인택 대표가 2021년 성수동에 플래그십 스토어 ‘피치스 도원’을 연 이유는 그런 대답에 가장 효과적인 답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피치스가 온라인 공간에서 받아들여진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말이나 글로 애써 정의하기보다는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즐거움을 선사함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다
침대 없는 침대 브랜드의 가게가 있다? 2020년 시몬스 침대가 성수동에 문을 연 ‘시몬스 하드웨어 스토어’와 해운대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가 그랬다. 자사 제품 대신 진열한 것은 매장이 위치한 지역의 문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제품들과 식료품. 시몬스는 이를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소셜라이징 프로젝트’라 이름 붙였다. 덕분에 팝업 스토어를 열 때마다 ‘SNS 성지’가 되며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젊고 건강하게 바꾼 시몬스는 강남구 청담동에서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굿즈 판매 수익도 만족스럽지만, 독특하고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을 통해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 브랜드에겐 장기적으로 더 큰 이득이다.
맥심플랜트
한남동 한복판에 자리한 맥심 플랜트는 동서식품의 플래그십 스토어이자 카페, 복합문화공간이다. ‘공장’과 ‘식물’을 동시에 의미하는 플랜트(plant)라는 이름처럼, 이 공간을 찾은 사람들은 초록 식물이 가득하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도심 속 정원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스페셜티 커피와 디카페인 메뉴, 라이브러리 등 다양한 콘텐츠가 제공되는 이곳은 바쁜 현대인에게 편안한 휴식을 선사하며 ‘맥심 = 커피믹스’라는 편견을 자연스럽게 깨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아부다비의 애플 스토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통유리를 설치해 내외부의 경계를 허문 공간이다. 특히 이 공간을 주목할 만한 이유는 수변 산책로를 매장으로 끌어들이고, 결과적으로 주변의 공공 광장을 활성화했다는 점이다. 간접적인 디지털 소통에 지친 사람들이 오프라인 공간을 찾듯이 회색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연이 주는 휴식을 끌어들인 공간을 찾고 있다.
하나은행의 복합문화공간 하트원
버려진 공간의 재활용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ESG 경영이 강조되며 브랜드의 공간 마케팅에도 쓸모없는 공간을 재활용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작년 11월 폐쇄했던 을지로 기업센터를 복합문화공간 ‘하트원(H.art1)’으로 새롭게 꾸몄다. 하나은행의 미술품 118점을 개방형 수장고 콘셉트로 전시하고, 전시장 위층에서는 VIP를 대상으로 미술품 담보 대출, 아트 펀드 등의 아트 뱅크 서비스와 함께 미술 투자 자문, 소장품 보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평일 운영 시간에는 누구나 무료로 미술품을 관람할 수 있다.
폐자재를 재활용한 가방과 액세서리로 유명한 스위스 브랜드 프라이탁(Freitag)은 제주시 탑동의 버려진 건물을 리모델링한 플래그십 스토어, ‘프라이탁 스토어 제주(by MMMG)’를 열었다. 폐자재로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을 만든다는 브랜드 철학을 직접적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단순히 입지가 좋은 곳에 매장을 내면 물건이 팔리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는 공간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브랜드를 인식하고 선택하는 방식 역시 바뀌고 있기 때문. 이런 변화에 발맞춰 오프라인 공간은 디지털과 결합하고, 온라인 채널은 오프라인 공간이 지닌 가능성에 주목하는 등 브랜드들은 소비자에게 스스로를 알리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친환경과 휴식, ESG 경영 등 간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브랜드 가치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오프라인 공간의 힘이기에, 공간 마케팅의 역할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
WRITER | KY CHUNG
PHOTOGRAPHER | JINNY AG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