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이란 무엇일까? 우디 앨런이 연출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헤밍웨이,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볼 수 있다면? 사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커뮤니티 시설에서라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격식 있는 이들이 누리는 ‘느슨한 연대’와 같다.
커뮤니티 1
21세기에 귀환한 살롱 문화
본래 ‘응접실’이란 의미의 ‘살롱salon’은 17~19세기를 거치며 지성인과 예술가가 한데 모여 토론을 펼치고 지식을 나누는 사교 모임이란 의미로 확장됐다.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궁정 안에서 살롱을 연 것을 시작으로 문인, 예술가 등 문화계 인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작품을 낭독하게 하는 모임이나, 자유 토론을 벌이는 귀족 부인들의 문화로 발전했다. 지적 탐닉과 예술의 향유, 세련된 취미가 공존하는 모임이었던 셈이다. 이후 남성을 중심으로 한 살롱이 탄생하기도 했는데 도버해협 건너 영국에서 19세기 초에 설립한 더 트래블러스 클럽The Travellers Club이 대표적이다. 현재까지도 운영하는 이 살롱은 역대 총리를 비롯해 수많은 정재계 인사가 거쳐간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살롱은 격식 있는 이들이 누리는 ‘느슨한 연대’에 가까웠다.
흥미롭게도 한 세기를 거치며 한동안 뜸했던 살롱 문화가 21세기 들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른바 ‘소셜 살롱’이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트레바리, 문토, 취향관, 넷플연가, 안전가옥 같은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한때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언택트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시대에 이 같은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타인과 마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사람들이 교류하고 싶어 하는 대상은 아무나가 아닌 취향과 관점, 가치관, 지적 수준, 때로는 경제적 수준이 자신과 걸맞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파트 커뮤니티에 싹을 틔운 살롱
오늘날의 살롱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트레바리나 넷플연가와 같이 취향으로 묶인 공동체다. 이들은 지적, 문화적 콘텐츠를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대화하기를 원한다. 다른 하나는 지역에 기반한 커뮤니티다. 온라인 중고 마켓으로 인기를 끈 당근마켓이 제공하는 서비스 ‘동네생활’은 지역 기반의 살롱 문화를 일부 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성격을 모두 지닌 공간이 있다. 바로 아파트 단지 내 커뮤니티 시설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눈높이가 맞는 이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최근 프리미엄 단지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시설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적잖은 투자를 해 고급화를 일궈냈음에도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을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community)로 보기는 어렵다. 많은 아파트 브랜드가 시설에만 집중할 뿐 정작 커뮤니티 콘텐츠에는 소홀했던 탓이다. 그래서일까? 입주민에게 외면당한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의 생존율은 고작 24.1%에 머문다(<2017 서울시 커뮤니티 시설 공급 및 활용 실태에 관한 연구> 중).
문제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입주민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이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자이는 입주민 2587명을 대상으로 커뮤니티 이용 실태를 면밀히 조사했다. 역시나 피트니스 시설과 골프 연습장 등 일부 시설을 제외하면 대체로 이용률이 떨어졌는데 커뮤니티 시설을 자주 이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자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변했다. 결국 본질은 시설의 질이 아닌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입주민의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커뮤니티 구축의 첫걸음이라고 결론 내린 자이는 ‘라이프타임 큐레이터’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만들었다. 삶의 형식 이전에 시간을 큐레이션해 ‘클럽 자이안’을 의미 있는 커뮤니티로 성장시키겠다는 뜻이다.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째깍악어와의 MOU는 그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송도자이 크리스탈오션에 째깍악어의 오프라인 거점 돌봄 공간 ‘째깍섬’을 선보인 것이다. 어린이 체험·놀이·배움 공간으로 조성한 이곳은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매력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육아 시간이 늘어나는 바람에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없었던 부모들에게 시간 여유를 되찾게 해줌으로써 자이안이 스스로 삶을 가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설이 아닌 사람을 보는 커뮤니티
자이가 ‘라이프타임 큐레이터’와 함께 강조한 키워드는 ‘콘텐츠 플랫폼’이다. 결국 공동체, 교류와 교감, 어우러지는 삶의 본질은 외형이 아닌 내실 있는 콘텐츠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 커뮤니티 디자인의 대가이자 <작은 마을 디자인하기> <커뮤니티 디자인> 등을 저술한 야마자키 료는 일찍이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멈추자 사람이 보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던 아파트 커뮤니티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입주민의 삶을 돌아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21세기형 살롱이 일상 가까이에서 꽃피우게 될 것이다.
Editor | MH Choi
Photography | GSENC
Illust | HK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