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한 어느 디자인 거장의 말이다. 조명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향점도 결국 여기에 있지 않을까? 스스로 무언가 가득 채우고 과시하기보다 공간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 진짜 ‘좋은 집’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조명 2
집으로 들인 빛, 길을 잃다
의자나 책상 위에 올라가 형광등을 갈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시절 집에서 심심찮게 목격하던 풍경이었다. 1950년대에 국내 생산을 시작한 형광등은 1960년대 들어 일상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후 LED 전구가 등장하며 광원 자체는 빠르게 교체되었지만, 형광등 시절 자리 잡은 조명 문화와 형태는 일반 가정집에 여전히 남아 있다. 국내 주거에서 조명은 직부등(천장이나 벽에 직접 설치한 전등)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직부등이 설치된 공간이 더 밝다고 느끼기에 이런 환경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홈 인테리어 열풍이 불면서 여기에 미묘한 균열이 생겨났다. 근래 들어 다양한 집 꾸미기 서비스가 유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의 집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 이들은 자신의 공간을 각종 소품과 가구, 포스터로 한껏 채우고 소셜 미디어 계정에 사진을 찍어 올리곤 한다. 이에 따라 홈 퍼니싱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매력 없고 선택지가 좁은 데다 눈에 밟히기만 하는 직부등이라면, 당연히 교체 1순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아파트 입주 후 등기구부터 교체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조명은 지나친 존재감으로 우리의 주거 공간을 장악해왔다.
물러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직부등이 문제가 되는 결정적 원인은 너무 눈에 잘 띈다는 데에 있다. 기존 조명은 눈부심이 심한 데다 국소 면적이나 바닥 면만 밝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다 보니 거실이나 주방 등에서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공간이나 벽면, 가구는 시야에서 멀어지고 오직 조명에만 눈길이 가게 되었다. 게다가 거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직부등의 경우 집 전체의 천장고를 낮아 보이게끔 만들기도 한다. 그동안 조명은 이처럼 지나친 존재감으로 우리의 주거 공간을 장악해왔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조명이 공간에 주연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자이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들으면 이해가 쉽다. 자이는 주거 공간에서 조명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줄이고자 노력 중이다. LED 등의 보급은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 자이는 2017년 아파트 조명을 형광등에서 LED 등으로 전면 교체했는데 덕분에 좀 더 슬림하고 모던한 디자인이 가능해졌다. 직부등이 예전처럼 과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공간과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에는 트렌드에 맞춰 더 얇고 에지가 부각된 디자인의 직부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공간에 각인된 조명
자이는 조명과 공간을 아예 일체화하는 방향도 추진 중이다. 소위 건축화 조명이라 부르는 것으로, 천장이나 벽, 기둥 등 건물 내부에 조명 기구를 매입해 내부 일체형으로 설치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조명이 인테리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쾌적하고 깔끔한 공간 연출이 가능하다. 거실 천장의 경우 개방감이 극대화된다는 장점도 있다. NGR(None Glare Reflector)의 적용 역시 조명에 쏠린 지나친 시선을 공간으로 돌리는 데에 도움을 준다.
본래 뮤지엄이나 럭셔리 명품관에 쓰는 이 기술은 눈부심 현상을 없애는 것은 물론 피사체가 보다 선명하게 보이도록 해준다. 90% 이상의 고반사율을 구현하는 코팅 기술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또 광원에서 나오는 눈부심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눈 건강도 유지해준다. 목표는 하나다. 조명이 아닌 조명이 비추는 피사체가 돋보이게 하는 것. 제아무리 아름다운 디자인의 기구라고 해도 공간을 살리지 못하는 조명이라면 소용이 없다. 조명을 아름다운 오브제로 만들기 이전에 빛과 공간의 본질을 생각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인테리어와 함께 성장하는 조명
사실 건축화 조명이 주거업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데에는 마감재의 진화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 아파트는 천편일률적인 벽지를 적용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공간에 두드러질 만한 부분이 없으니 굳이 조명까지 동원해 포인트를 강조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소비자의 높아진 안목에 따라 아파트들도 다양한 마감재 옵션을 준비해놓고 있다. 특히 우드 패널, 대리석 접합 타일 등 고급 마감재를 적용하게 되면서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조명의 필요성이 커졌다. 다시 말해 공간의 감성이 다양해지고 라이프스타일이 풍성해지면서 조명의 가치가 재평가된 것이다.
빛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필요해진 시기다. 만약 조명이 기존 방식을 고수하며 공간의 주인공을 자처한다면 집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용자의 삶을 이해하고 이를 주거 안에 녹여낸다면 조명은 비로소 주연(공간)을 돋보기에 하는 ‘빛나는 조연’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Editor | MH Choi
Photography | GSENC
Illust | HK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