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를 살 때 눈으로만 고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악기의 기준이 예쁜 모양새뿐 아니라 아름다운 소리에 있는 것처럼,
오늘날 거주 공간의 가치는 점차 그 중심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즉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20세기 초 시작된 현대건축은 한동안 시각 중심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아파트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형태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건축은 빛 아래 모인 볼륨의 지적이고 정확하고 장대한 조합이다. 우리의 눈은 빛 아래서 형태를 인식하게 되어 있다. … 이것이 바로 조형예술의 본질이다.”
그의 한국인 제자였던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역시 조형예술로서의 건축에 무게를 두었다. 그는 귀국 후 한국에서 개최한 자신의 첫 작품전에 대해 ‘서구적 조형 정신을 동양적 조형 전통 위에 올바르게 뿌리박음으로써 새로운 건축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을 장만해 보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그 이후 대표작인 프랑스 대사관부터 유작으로 남은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한국 고전 건축의 처마 아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곡면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형태로 구현해냈다.
‘공간’과 ‘경험’에 담긴 건축의 아름다움
한편 김중업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건축가 김수근은 건축의 아름다움을 형태가 아닌, 사람이 머무는 빈 공간에서 찾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한국 최고의 건축’으로 꼽혔던 그의 작품인 공간 사옥(현 아라리오 갤러리)의 매력은 그 외형뿐 아니라 거친 벽돌들이 촉각을 자극하고, 인간적인 스케일의 공간들이 완급을 조절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는 잃어버린 한국 전통 공간의 경험을 회복함으로써 형태 중심적 건축에 대한 반성의 기회로 삼기 위한 노력이었다.
공간 사옥에서는 휴먼 스케일의 공간이 계속 이어지는 독특한 건축적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연합뉴스
이처럼 건축의 중심 가치가 시각적인 형태에서 몸의 다양한 감각에 의한 경험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로, 그런 경향은 일군의 건축가들에 의해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핀란드의 건축가이자 건축 이론가인 유하니 팔라즈마(Juhani Pallasmaa)는 1996년 출간된 그의 책 <The Eyes of the Skin>(한국어판: 건축과 감각, 2013)을 통해 시각 중심적 경향을 비판하며 촉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이 깊이 관여하는 경험으로서의 건축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의 제목대로 인간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피부를 통해 건축을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의 손잡이는 그 건물과 악수하는 것이다(The door handle is the handshake of the building)”라는 말로 촉각적 경험을 중시했으며, 실제로 다양한 도어 핸들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간이 주는 총체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발스 온천장.
건축은 공간을 인지하는 모든 요소의 총합
공간의 경험에는 직접적인 접촉뿐 아니라 몸 전체의 총체적인 감각이 동원된다. 뜨거운 물건을 대할 때 손끝이 닿지 않아도 열기와 연기, 끓는 소리를 통해 그 온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다양한 감각들은 각자의 거리와 방식으로 대상을 인지하며 서로 연계하고 있다. 예컨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31번째로 수상한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지난 2003년 한 강연에서 자신의 건축을 ‘분위기(atmosphere)’라는 주제로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더불어 소리나 몸이 느끼는 온도와 습도, 주변 사물과의 상호작용 등 공간을 인지하게 하는 모든 요소의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건물은 저마다 독특한 음색을 갖고 있다. … 건물은 비율과 재료에 따라 고요함 속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라고 말하며 눈이 아닌 귀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건축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다.
시각 중심주의에서 탈피해 경험 중심의 건축을 지향하는 이 같은 시도들은 일부 건축가들의 생각과 작품으로부터 시작했으나 오늘날 아파트를 비롯하여 일상적인 생활 공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 자이 고객경험 디자인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된 ‘자이 디자인 컴포넌트’ 프로젝트 역시 그런 흐름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앞선 자이 주거경험 디자인 시스템 프로젝트에서 도출된 4가지 원칙과 디자인 언어들을 실제 건축 환경에서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자이 디자인 컴포넌트는 거주자가 매일 지나는 단지 내 공용 공간(Public Space)부터 거주하는 공간(Unit), 그리고 모두가 함께 누리는 공간(Community)까지 모두 3가지 층위에서 나타날 변화들을 다루었다.
자이 디자인 컴포넌트는 입주민이 집안과 단지 어디서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빛, 사랑, 삶이 가득한 공간
먼저 주출입구, 지하주차장, 동출입구 등 거주자가 가장 먼저 만나고, 매일 지나는 공용 공간은 지하 공간에도 빛과 자연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존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벗어나 보다 밝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각 세대 내부는 거주자의 취향과 삶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기존에 없던 방식의 가변형 평면을 고안했다. 또한 저층 복층 특화 평면, 1~2인 가구를 위한 소형 주거 평면 등 다양한 활용 사례를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커뮤니티 시설의 경우 썬큰, 아트리움 등 다양한 건축적 장치를 통해 외부와 내부 공간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각 실에서 자연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전체적인 디자인 접근 방향을 수립하였다. 피트니스, 골프연습장 등 기본 커뮤니티 시설부터 키즈센터, 스카이라운지 등의 차별화 시설까지, 프로그램별 세부 기준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앞으로도 아파트 입주자들이 느끼는 경험과 감정을 건축적으로 배려하는 이런 노력이 계속된다면 아파트는 이제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로 구분되는 대신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거주 경험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는 나아가 집을 선택하는 기준이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즉 좋은 거주의 경험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WRITER | SCORER
ILLUSTRATOR | MALLANGLUNA